스포츠한국은 서울 강서구에서 축구교실을 준비중인 황진성을 만나 은퇴에 대한 소회, 프로 16년 생활의 회고, 축구선수가 아닌 유소년 지도자로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지난해까지 강원FC에서 활약했던 황진성은 계약만료 후 새로운 팀을 찾았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고 젊은 선수를 선호하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3월초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조용히 은퇴를 알렸다.
은퇴 결심 후 처음으로 언론 앞에 선 황진성은 “억지로 프로생활을 연장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은퇴하는게 맞다고 봤어요. 다행히 2017년 최윤겸 감독님 밑에서 미련없이 한시즌을 풀로 뛰었고 2018년은 출전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해 ‘또 이런 스트레스를 겪지말자’는 생각으로 은퇴했죠. 2017년 후련하게 뛰었기에 은퇴를 해도 아쉽지 않아요”라며 은퇴 결심 후 두달간 마음의 정리를 다했음을 밝혔다.
“아내도 제가 선수생활을 힘들게 한걸 아니 ‘행복한걸 하자’고 했고 부모님도 미련갖지 말고 새로운 인생 설계를 하자고 하셨죠. 가족들과 함께 은퇴를 결정했고 축구교실을 하고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금, 참 재밌고 행복해요.”
서울 강서구의 ‘K리거 강용 축구교실’ 3호점을 준비 중인 황진성은 현재 취미반 아이들의 등하원을 직접 운전하는 것은 물론 레슨도 직접 하고 있다. 엘리트부 선수들도 직접 가르치는데 하루하루 성장하고 이해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뿌듯하다고.
“방송이나 당장 프로 지도자를 하는 것보다 해보니 재밌고 뿌듯한 일을 하는게 맞다고 봐요. 전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즐겁네요. 제 성향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맞아요.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서 절 처음엔 모르는데 그나마 ‘K리그 50골-50도움 클럽’ 가입 선수라고 하면 놀라워하더라고요. 하하.”
▶브라질 유학도 다녀온 포철공고 에이스, 김병수 감독에게 배우다
유소년 지도자 생활에 대한 얘기는 잠시 뒤로 하고 황진성의 ‘축구 선수’ 생활을 뒤돌아본다. 박항서 베트남 감독 등과 선수생활을 함께한 아버지(축구선수 황병철) 덕에 어릴때부터 아버지를 통해 기본기를 배운 황진성은 초등학교 4학년 축구부에 들어가며 엘리트 축구의 길을 걸었다.
포철공고 출신인 황진성은 당시에도 꽤 뛰어난 유망주로 고등학교 1학년 시절 포항 구단에서 브라질 유학을 보내는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도 선명해요. 분명 도움이 됐죠. 한국이 아닌 브라질, 새로운 환경에서 축구를 하는 것만으로 성장에 도움이 돼요. 브라질과 상대해서 이기든 지든 신기한건 한팀에 꼭 한명은 ‘정말 잘하는’ 에이스가 있다는거예요. 그런 선수들을 모아놓으니 ‘브라질 축구’가 되는거겠죠. 아마 제가 당시 이름을 기억 못해서 그렇지 거기서 상대해본 선수 중에 지금 유럽에서 뛰는 선수도 많을겁니다.”
- 스포츠코리아 제공
“중학교까지는 공격수였는데 김병수 감독님 덕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바꿨죠. 공격형 미드필더는 공을 어떻게 잡아놔야하고 어떻게 움직여야하고 어디로 패스해야하고 등등 모든걸 김병수 감독님께 배웠고 그걸로 전 프로생활을 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제 프로생활 마지막이 김병수 감독님이었는데 처음과 끝을 함께한 셈이죠.”
▶프로 데뷔한 신인이 등번호 10번… 따바레즈 때문에
포철공고를 졸업한 황진성은 자연스럽게 2003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다. “당시 포항은 최순호 감독님께서 지휘봉을 잡고 계셨죠. 동계훈련때는 신인이니까 등번호 30번대를 달고 연습경기에 나갔어요. 그런데 시즌 들어가기전에 공식 배번 배정이 있었는데 30번대에 제 이름이 없어서 놀랐죠”라며 회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형들 라커룸 쪽에서 ‘웅성웅성’ 하더라고요. 가보니 제 이름이 무려 등번호 10번에 놓여있더라고요. 정말 부담이 ‘팍’됐죠.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형들이 ‘쟤는 뭔데 등번호 10번이야’하는 눈초리도 있는 것 같아 부담됐어요. 최순호 감독님에게 참 감사하긴 한데 신인 입장에서 정말 너무 부담되더라고요.”
신인 선수가 데뷔 등번호가 10번, 그것도 ‘유망주 전문가’ 최순호 감독에게 발탁됐다는 것만으로 황진성에 대한 기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내 6개월만에 황진성은 등번호 10번에서 짤렸다고.
“여름에 브라질 선수 까시아노가 입단하면서 ‘등번호 10번’을 받는게 계약서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 8번으로 이동했고 큰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아 다행이었죠.”
이후 쭉 등번호 8번을 달고 뛴 황진성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야할 프로 초창기 최대 적이 있었으니 바로 외국인 선수 따바레즈의 존재였다. K리그에서 4시즌을 뛰며 아직도 회자될 정도로 뛰어난 활약(20골 29도움)을 한 따바레즈는 정확히 황진성의 포지션인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와 겹쳤다.
황진성은 따바레즈로 인해 측면, 처진 스트라이커로 포지션 변경을 해야했고 자연스레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선발로 뛰고 싶고 확실한 주전이 되고 싶은데 따바레즈가 있어서 답답하고 힘들었죠. 따바레즈가 포항 역사에 남을 미드필더잖아요. 당시 저에게는 너무 큰 존재였죠. 배우는 것도 많았지만 따바레즈 때문에 경기를 못 나가니 참 답답했죠”라고 회상한 황진성이다.
- 연합뉴스 제공
화려한 프로 데뷔에도 경쟁 구도에 밀려 좀처럼 확실한 주전을 차지하지 못하고 꽃을 피우지 못했다. 황진성은 “포항은 K리그, FA컵, ACL에서 우승했어도 나는 확고한 주역은 아니었다”고 한다. 20대 중반을 그렇게 보낸 황진성이 드디어 전성기를 맞은 것은 2011년 황선홍 감독이 포항에 부임한 이후였다.
황 감독은 이명주-황지수 위에 황진성을 기용해 적극적으로 그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능력을 활용했다. 황진성은 2011시즌 K리그 30경기 6골 9도움으로 예열하더니 2012년 41경기 12골 8도움의 ‘미친 활약’을 하며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기 이른다. 당시 FA컵 우승의 주역이었다.
“스스로 ‘확실한 주전’, ‘라인업에 먼저 쓰고 보는 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황선홍 감독님 오신 이후 그렇게 됐죠. 황 감독님 덕에 제 축구인생에 꽃이 폈다. 가장 존경하는 감독님 중 하나다. 항상 ‘포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해주시는 분이었다. 동기부여가 남달랐고 선수단과의 유대관계는 프로 인생 다시없을 조화였죠.”
16년 프로 커리어에 우승컵만 6번(K리그 우승 2회, FA컵 우승 3회, ACL 우승 1회)을 들어봤지만 역시 최고 우승컵은 영원히 회자되는 2013년 K리그 우승이라고. 당시 포항은 최종 라운드에서 울산 현대와 사실상 결승전에서 후반 추가시간 득점을 통해 우승을 달성했다.
“외국인 선수 하나 없이 감독님과 선수단의 유대관계만으로 일군 우승이잖아요. 마지막 경기에서 울산을 이기고 우승하는 과정까지 극적이었고 저 역시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K리그 역사에 영원히 회자되는 우승을 달성한 멤버였다는 것은 자부심이고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순간이죠.”
- 연합뉴스 제공
http://sports.hankooki.com/lpage/soccer/201905/sp2019053117445693650.htm
2019-05-31 08:44:56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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